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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지

달동네 골목길로



[중앙일보 손민호.이가영.한은화.권혁재] 언제부턴가 마을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동네는 외지에서 내려온 화가 양반들이 고불고불 비좁은 골목길을 올라와 그림을 그렸고, 어떤 동네는 주민들이 서투른 손으로 붓을 들어 벽에 알록달록 색깔을 입혔습니다.

강원도 폐광 마을에도, 대도시 복판의 달동네에도, 바다 훤히 내다보이는 서해의 갯마을에도,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동해안 작은 마을에도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금이 간 담벼락엔 동네 아낙의 주름살 자글거리는 웃음이, 골목에 내다 놓은 화분엔 활짝 핀 민들레가, 기우뚱 서 있는 전봇대엔 울음 터뜨린 아이의 얼굴이, 문짝이 반쯤 떨어진 동네 공중변소엔 앙증맞은 화장실 그림이 정성스레 그려졌습니다.

젊은 사람은 다 떠나고 이젠 늙어 갈 곳이 없는 노인만 남은 적적하고 막막했던 후미진 마을에 사람들이 한 명씩 찾아 들기 시작했습니다. 버려져 흉하고 치우지 않아 냄새 풍기는 달동네는 이제 저 먼 데서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입니다. 그 젊은 객들은, 그림이 좋아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이번 주 week&은 전국의 벽 그림 마을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림의 수준이 엄청난 경지여서는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개발 사업에 밀려 달동네까지 간 사람들, 탄광이 문을 닫았지만 갈 데가 없어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꿋꿋하게 살고 있어서입니다.

전국의 벽 그림 마을마다 그림도 다르고, 그림을 그린 사람도 다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도 다르지만 벽 그림 마을에서 받은 인상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그건, 사람 냄새 나는 삶이었습니다.

충북 청주의 수암골에 들렀을 때, 동네 어귀 삼충상회 앞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기자에게 시원한 캔커피를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이곳은 주민 120명 대부분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이고, 평균 연령은 예순 살이 훌쩍 넘는 달동네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주말이면 1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온답니다. 수암골 어르신들은, 낯선 젊은이가 수시로 기웃거려도 불쑥 카메라를 들이대도 싫은 기색이 없었습니다. 캔커피를 건네 준 할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되레 고맙지요. 애들이 없어 휑했던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날마다 찾아와 주는데….”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담벼락엔 알록달록 이야기

풍금 계단엔 도레미 화음 푸근했습니다



서울부터 충북·경남·강원·부산 등 전국에 있는 벽화마을을 찾아 다녔다. 그곳을 소개한다.

손민호ㆍ이가영ㆍ한은화 기자

서울 이화동 낙산 프로젝트 2006년 70여 명의 작가가 달동네에 벽화와 설치미술로 명소를 만들었다. 가파른 계단과 좁은 담을 캔버스 삼아 색색의 꽃과 새가 그려졌다. 곳곳에 숨어 있는 벽화를 찾아 미로 같은 달동네의 길을 가다 보면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포인트 해질 무렵 낙산공원에서 아래를 보라. 도심에서 지는 해가 아련하다. 대학로에서 연극 한 편을 보는 것도 추천한다.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 낙산공원으로 가는 표지판을 따라 간다.

서울 동대문 동화시장 허름한 5층 건물에 의류 부자재를 파는 700여 개의 점포가 있다. 이 건물엔 2007년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장 곳곳에 벽화가 그려졌다. 단추·스팽글 등 의류 부자재를 형상화해 만든 작품이 많다. 옥상정원은 '단추·지퍼 등 의류 부자재 수집광인 거인이 산다'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거인이 쓸 법한 지퍼·단추가 사람들의 쉼터가 됐다. ●포인트 벽화 중에 이 시장의 상인이 있다. 그림 속 인물을 찾아보자. 동대문시장에서 쇼핑하고, 청계천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추천한다. ●가는 길 동대문 평화시장 옆, 쇼핑몰 두타 뒤에 있다.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 8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경남 통영 동피랑 마을 통영의 코발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고단한 서민들의 터전이다. 천혜의 경관을 간직한 누추한 동네를 통영시는 철거할 계획이었다. 이에 2007년 사회단체인 '푸른통영21'이 나서 '그림이 있는 골목'으로 바꾸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누추한 언덕배기의 가난한 마을은 천천히 걸어 다니며 볼거리와 휴식을 추구하는 '슬로시티'의 명물로 거듭났다. ●포인트 언덕에서 발을 멈춰 통영항을 내려다 보라. 문화예술인의 집이 5곳 있다. 골목에서 우연히 소설가 강석경씨를 마주칠 수도 있다. ●가는 길 통영 중앙활어시장, 일명 '강구안'을 찾으라. 그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활어시장 쪽을 보면 오른쪽 작은 언덕이 동피랑이다.

경남 마산 문화동 당산마을 마을 입구 식당집에는 푸른 나무 옆에서 닭이 웃고 있고, 아이들이 사는 집엔 색색의 연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모두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애틋한 모녀 상봉의 전설이 깃든, 경남 마산에서 가장 높은 곳 '만날고개'의 턱밑 마을 40여 가구의 벽 그림은 아주 선명하다. 올 5월 그려졌기 때문이다. ●포인트 고갯마루에서 이은상 선생이 '가고파'에서 읊었던 '내 고향 남쪽 바다'를 바라보라. 승용차로 15분쯤 걸리는 마산 공동어시장에서 아구찜을 꼭 먹고 올 것. ●가는 길 마산시 문화동 만날고개를 찾아가면 된다. 만날고개 등산로 입구 아래가 바로 당산마을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부산 문현동 안동네 하늘 아래 1번지 부산의 대표 달동네인 이곳의 금 가고 색 바랬던 옹벽들이 캔버스가 됐다. 지난해 3월부터 3개월에 걸쳐 250여 가구의 벽에 학생과 시민 230여 명이 참가해 그렸다. 이로써 전국에서 가장 큰 벽화마을로 거듭났다. 삭막했던 마을이 이젠 주말이면 몰리는 전국 사진 동호인들로 떠들썩해졌다.●포인트 마을 입구에 벽화 지도를 보고 미로를 탐험하듯 벽화를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모두 47점의 벽화엔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광안리 바닷가가 15분, 해운대 해변은 30분 거리에 있다. ●가는 길 부산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문전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현 현대 2차 아파트가 인접해 있다.

충북 청주 수암골 청주에선 수암골이라 하면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청주시 상당구 수동 15통으로 가야 한다. 지난해 청주시가 수동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고도제한에 걸려 재개발에서 제외된 15통 일대 구역을 이른다. 이 소외된 지역에 지난해 10월, 청주 민예총이 벽화사업을 했다. 수암골의 담벼락 그림은 그 집의 주인을 닮아 있다. 어린아이 3명이 그려진 집은 수암골에서 유일하게 어린아이 셋이 사는 집이다. ●포인트 동네 어르신과 수다를 떨며 돌아다니는 맛.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가 청주에서 간행됐다. 그 흔적이 청주고인쇄박물관에 남아 있다. ●가는 길 청주시청까지 찾아간다. 시청 건너편 달동네가 수암골이다.

전북 고창 돋음별마을 선운사 건너편, 질마재마을은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고향이다. 바로 옆 미당 묘소가 있는 마을이 안현마을이다. 2006년 농림수산식품부가 농촌체험마을로 지정하면서 돋음별마을로 이름을 바꿨다. 농촌체험마을이 되면서 주민들은 동네 어귀에 국화를 심고, 농가마다 국화꽃을 그렸다. 그림은 서울에서 사람을 불러 맡겼다. 그랬더니 주름살 가득한 동네 아낙의 얼굴을 담벼락에 대문짝만하게 그려넣었다. 미당의 시구 '거울 앞에서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국화 옆에서') 때문. 벽 그림의 주인공인 양옥순(68)씨에게 모델을 부탁했더니 “그놈의 기자들, 이젠 지겹구먼”이라고 받아쳤다. 시 한 수가 바꿔놓은 풍경이다.●포인트 미당 시집 『질마재 신화』를 읽고서 가자. 풀 한 포기도 새롭게 보인다. 선운사가 지척이다. 미당시문학관과 미당 생가도 꼭 들를 것.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선운사까지 간다. 거기서 2㎞쯤 더 가면 미당 생가 이정표가 나온다.


강원도 영월 모운동마을 구름이 모이는 마을, 모운동(募雲洞). 망경대산 기슭 해발 700m 위의 산동네다. 20년 전엔 석탄 덕분에 2만 명 넘게 북적거렸다. 하나 89년 폐광이 되면서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 이젠 26가구 50명 정도 산다. 그 버려진 마을에 김흥식(54) 이장 부부가 폐가의 건물 벽에 동화 그림을 그리고 휑한 길섶에 꽃을 심었다. 지난해 행정안전부 주관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에서 대상을 받았다. 동화가 된 폐광마을은 옆구리에 구름을 끼고 산다. ●포인트 이장님을 꼭 만날 것. 운이 좋으면 이장님과 함께 승합차 동네 투어를 할 수 있다. 주변의 빼어난 자연 풍광을 맘껏 즐길 것. ●가는 길 영월읍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30분쯤 산길을 달리면 왼쪽에 김삿갓 묘소가 나온다. 반대편 산자락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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