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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지

“낙서 대신 벽화를” 지방 달동네가 웃는다


[동아일보]

“종점, 종점이라예….”

29번 부산 버스 종점. 지쳐 보이는 전봇대 위엔 ‘안창길’이라는 푯말이 구부정하게 걸려 있었다. 비탈 고개를 넘고 또 넘어 도착한 이곳은 안창마을. 버스에 남아 있던 너덧 명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내렸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안창庫’라는 문패가 걸린 창고를 향해 저마다 준비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마을에서 내려오던 한 아줌마가 찰칵찰칵 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서울에서 왔는교?”라며 말을 걸었다. 그 옆에는 남녀 대학생 한 쌍이 4B 연필로 검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부산 동의대 미대생인 정효주(20·여) 씨는 “복주머니를 입에 문 학(鶴)”이라며 “이 그림을 그리면 왠지 마을에 복이 찾아올 것 같다”며 웃었다.

부산진구 ‘오리고기’ 골목과 동구가 한데 얽힌 이곳. 6·25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 살았다는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 이곳에 지난해부터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붓과 페인트 통을 든 작업복 차림의 미대생부터 큼지막한 디지털렌즈교환식(DSLR) 카메라를 목에 건 젊은 연인들까지.

그들을 이 외진 달동네로 끌어모은 것은 바로 미술의 힘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미술추진위원회(아트인시티) 주최로 지난해 이 마을에선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100명이 넘는 지역 작가와 동의대 미대생들이 지원금 6000만 원을 받아 5개월 동안 금 간 담장, 온갖 낙서로 흉물이 된 동네를 바꿔 놓았다. ‘새총 쏘는 아이들’, ‘담쟁이 넝쿨’ 등 벽화는 이미 마을의 상징이 됐다.

마을 주민 이성자(52) 씨는 “주말이면 서울말 쓰는 사람들이 100명 가까이 여기를 찾는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 달동네는 그렇게 한 폭의 예술작품이 돼 가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마을, 소외된 공간, 희망이 보이지 않던 외딴섬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고달픈 과거를 뒤로한 채 시나브로 밝아지는 우리네 동네. 그 동인(動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방발(發) 공공미술이다.

○프로젝트1 달동네, 그리고 희망

공공미술 또는 ‘퍼블릭 아트’. 미술작품을 공공장소에서 대중에게 선보이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공개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 속에는 예술작품을 통한 지역공동체와의 ‘소통’이 담겨 있다. 이런 프로젝트가 최근 부산을 비롯한 지방 달동네나 소외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안창마을이 명소가 되기까지는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이 절실했다. 붓과 페인트 통을 들고 찾아온 작가들에게 주민들은 다 쓰러져 가는 천장을 가리키며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 물 새는 천장이나 고쳐달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프로젝트 총감독인 서상호 작가는 노인만 남은 이 달동네를 위해 아이들을 내세운 그림을 그렸다. 그 첫 작품이 바로 ‘새총 쏘는 아이들’이다. “마을이 화사해졌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 뒤 집 앞 번지표를 새로 달 때는 너도나도 “우리 집도 바꿔 달라”고 신청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이렇게 거듭난 이 마을에서는 현재 이달 말 완성을 목표로 2차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서 작가는 “지난해에는 관(官) 주도로 이뤄졌지만 지금은 우리 힘으로 돈을 모아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공미술로 운명이 바뀐 부산 달동네는 안창마을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말 열린 ‘2008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주거환경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남구 문현동 달동네는 원래 공동묘지촌으로, 250여 가구가 무허가 건물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올해 3월 부산시 주도로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쩍쩍 갈라진 벽 위로 ‘전화하는 아이들’ ‘봄을 펼치는 아이’ 등 47점의 그림이 태어났다.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마더’가 이곳에서 촬영한다는 소식까지 겹치며 문현동 달동네는 일약 명소로 떠올랐다.

부산시 건축주택과 건축계획팀의 김형찬 계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프로젝트를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충북 청주시의 달동네인 수동에서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충북지역회 주최로 최근 ‘수동 아카이브전(展)’이 열렸다. 지역작가 24명이 참여한 이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는 주민과의 소통을 위해 벽화작업 외에 지역사진관을 만들어 ‘어르신 사진 찍어드리기’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프로젝트2 시장, 그리고 사람 냄새

“아휴, 여기 앉아서 삼겹살에 소주 좀 잡숴!”

강원 영월군의 어느 시골집 마당. 삽겹살 파티를 벌이던 조은진(85) 할머니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집 벽을 확 바꿔놓은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시 벽화를 자랑했다.

“처음엔 반대했지. 그런데 완성품을 보니 화사하더라고. 동네가 딴 세상 같아. 헌 운동화를 새로 빨아 신은 느낌. 길거리에 사진기 든 애들이 많아졌어.”

그 시간 할머니 집 밖에는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담벼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 동호회 회원인 이들은 “서울에서 고속버스 타고 2시간 만에 왔다”며 활짝 웃었다.

안성기 박중훈 주연의 영화 ‘라디오 스타’ 촬영지로도 유명한 영월. 썰렁하기만 하던 이곳은 최근 한국건축가협회가 주관하는 ‘공간문화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1960, 70년대 주변 탄광촌 광원, 건설현장 노동자로 북적였던 영월 요리골목은 탄광들이 문을 닫자 찬바람이 불고 점차 쇠락해갔다. 영월군은 히든카드를 꺼냈다. 바로 공공미술 프로젝트 ‘지붕 없는 미술관’이었다.

프로젝트를 지휘한 ‘송주철 공공디자인 연구소’의 송주철 소장은 “처음엔 주민들이 결사반대했지만 골목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업하자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했다.

비결은 작품 소재였다. 음식점 ‘강산회관’의 동상 ‘호호 아줌마’와 ‘미락식당’ 옆 벽화 ‘할머니와 며느리’는 모두 가게 주인이 직접 모델로 나섰다. 이 골목을 대표하는 벽화의 하나인 ‘새초롬한 아이’는 맞은편 음식점 ‘중앙야식’의 주인인 이경희(51) 씨의 딸 김현(7) 양이 주인공이다. 이 씨는 “인터넷에 오른 사진을 보고 딸을 만나러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밖에 영월 출신 영화배우 유오성의 동상과 의자, 안성기 박중훈을 그린 아파트 벽화, 이태준의 소설 ‘영월 영감’을 패널로 만든 ‘소설의 벽’ 등도 모두 ‘지역밀착형’이다. 따라서 1년간 1억80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들였지만 골목 분위기는 소박하다. 영월군은 현재 이 골목에 공원을 짓고 있다.

광주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동구 대인동 대인시장은 최근 ‘장미란 벽화’로 ‘떴다’. 9월 ‘2008 광주 비엔날레’ 행사와 맞물려 시장에서 역도선수 장미란을 비롯해 해태 타이거즈 선수 시절의 선동렬 등을 모델로 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덕이다.

큐레이터 박성현 씨가 만든 ‘복덕방 프로젝트’라는 예술팀이 주도했다. 대인시장 내에 작업실을 둔 이들은 벽화작업은 물론, 문화축제를 열면서 상인들과 함께 재래시장을 ‘놀이 공간’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올 초에는 경남 마산시 오동동의 상인연합회 소속 회원들이 마산시의 젊은 예술가 모임인 ‘프로젝트 쏠’과 함께 아귀찜 골목, 통술 골목 등 오동동의 대표 식당골목을 자발적으로 바꾸기도 했다.

○프로젝트3 정류장, 그리고 미술관

“예끼! 어디 건방지게 오죽헌을 ‘오죽장’이라고 하는 거냐!”

강릉의 어르신들이 노한 까닭은? 강원 강릉시의 대표 관광지인 오죽헌. 그곳 버스정류장을 ‘오죽장’ 여관으로 바꾼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007 아트 프로젝트’다. 이들은 8월 ‘버스정류장 시즌3-배틀전’을 펼치며 오죽헌정류장을 오죽장 모텔로, 남대천정류장을 보따리 모양으로 변신시켰다.

강릉대 미대 00학번이 주축인 이들은 2006년 경포대 버스정류장을 시작으로 지난해 송정해수욕장 부근 정류장 등 강릉시내 버스정류장들을 돌아다니며 공공미술을 진행하고 있다.

이유는 이렇다. 여름철 경포대를 비롯한 이곳 해수욕장에 외지인들이 몰렸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이 마치 버스정류장과 같다는 것. 그 속에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강원도 사람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주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오죽장은 핑크 소파를 들여놓고 샤워기까지 설치하는 등 다소 도발적인 콘셉트를 시도했다. 반면 남대천 보따리정류장은 역사를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 과거 강릉시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던 곳인 만큼 이들은 시장에 다녀온 어머니의 손에 들린 보따리를 푼다는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팀 멤버 임은옥 씨는 “버스가 끊긴 오후 10시부터 새벽까지 작업을 했는데 보수적인 어른들이 ‘왜 정류장을 건드리느냐’며 혼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류장 공공미술이 떠오른 계기는 올해 8월 대학생들의 MT 요지 1순위로 꼽히는 경춘선 강촌역의 ‘그래피티 프로젝트’부터다. 한국관광공사로부터 7000만 원을 지원받아 이뤄진 강촌역 프로젝트는 애초 낙서를 없애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그러나 ‘강촌=젊음=힙합’에 착안해 힙합 문화의 한 축인 그래피티 아트를 도입해 역(驛) 기둥 중 20개, 선로 100m를 그래피티 작가들이 맡았다.

이후 강촌역 일대는 그래피티 명소로 떠오르며 8월 한 달간 9만4000명의 관광객이 찾게 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3만2000명의 3배.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코레일 수도권북부지사의 박민규 팀장은 “앞으로 역 외부와 계단, 그리고 열차에서까지 그래피티 아트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부산·통영·영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